제목

(제4회 우수상)먼 곳에서의 아버지의 사랑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2

조회수

2217

내용

제4회 우수상
먼 곳에서의 아버지의 사랑

박 미 정 / 서울 광진구 중곡동

새벽 3시, 아버지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온통 깊은 어둠에 잠겨 있을 시간, 나는 잠결에 현관문을 밀고 나가시는 아버지의 인기척을 느끼며 깊은 아픔을 맛보곤 했다.

환경 미화원!
사람들은 흔히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우받지 못하는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아버지는 그 일을 천직이라 여기시며 15 년 가까이 묵묵히 일해 오셨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우리 5 남매를 키우면서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 가끔씩 우리에게 매달 월급에서 일정액의 국민연금이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흐뭇해 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까짓 것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때까지 나는 국민연금에 대해서 잘 몰랐고 매달 납부되는 많지 않은 금액으로 평생 동안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국민연금에 기대를 거는 아버지가 왠지 모르게 안스러웠다. 아버지는 퇴직을 하시고도 조금만 더 납입하면 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시며 국민연금을 매달 꼬박 꼬박 납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도 큰 불행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으신 것이었다. 설암(舌癌) 말기! 그 무시무시한 불치병 앞에서 우리는 눈물만 흘렸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평소엔 믿지도 않던 신들의 이름만 애타게 찾았다. 무능하고 나약한 인간의 속성이었다. 몇 달 전부터 음식을 드시면 입안이 아프다고 가끔씩 말씀하셨는데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고 말았던 것이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미 암세포가 많이 퍼져서 수술을 한다 해도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우리 가족은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24시간의 수술은 마치 천 년과도 같이 긴 시간이었다. 수술실 앞 전광판에서 다른 환자들의 이름이 수십 번 바뀌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은 하루를 꼬박 켜져 있었다. 우리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긴장감으로 수술실 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희미하게 느껴지는 ‘희망’ 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절박한 심정으로 끌어안으면서 .....

수술 결과는 좋은 편이었지만 워낙 대수술이라 수술 후에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계속되었다. 삼 개월 동안의 입원치료와 퇴원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항암 치료 .....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들다는 치료를 계속 받으면서 아버지의 모습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설암이라 치아를 뽑고 혀를 수술하였기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정신적인 힘겨움 위에 시간이 갈수록 무게를 더해 가는 경제적인 어려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푼푼이 모아 두었던 저축 액은 수술비로 이미 다 나가고 얼마 안 되는 언니들의 월급으로 아버지의 치료비며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무너짐으로 해서 가족들도 여러 면에서 어려웠지만 누구보다도 힘들어하신 분은 아버지 본인이셨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의기소침해지시고 투병에 대한 의지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생활 속에서 아버지의 나이가 만 60세가 되어 ‘특례노령연금’ 수급자가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첫 번째 연금을 받으시고 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하시고 뿌듯해 하셨다. 큰 부담 없이 조금씩 넣어오던 연금을 정말 필요한 시기에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 속에서 느낀 작은 성취였고 희망이고 빛이었다. 불입연수와 금액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액수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치료비에도 보태고 용돈으로도 쓰시고 아껴서 조금씩 저축까지 하셨다. 연금은 그런 실질적인 도움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정신적인 위안을 안겨주었다.

늘 어머니에게서 용돈을 타 쓰시던 아버지가 연금액을 직접 관리하시면서 가끔씩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리거나 선물을 하셨는데 그러실 때의 그 뿌듯해 하시는 표정이란 월급봉투를 내놓으실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삼 개월에 한 번씩 받으시는 그 연금은 늙고 나약해지신 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 당당해질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투병생활로 힘들어하실 때 우리가 가끔 오래 사셔야 연금을 더 많이 받으실 수 있지 않느냐고 농담조로 얘기하면 당신이 돌아가셔도 어머니 앞으로 ‘유족연금’이 나오니 괜찮다고 하시며 웃으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힘겨웠던 병마와의 삼 년 가까이 싸우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아버지가 수술 후의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생활을 지켜보았기에 이제는 편안한 안식을 찾으셨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삼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유족연금을 계속 지급 받고 계신다. 어머니는 통장에 연금이 입금될 때마다“이 양반이 죽어서도 나한테 돈을 벌어다 주시는구나”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그리고 그 돈을 함부로 쓰실 수가 없다며 급한 일을 대비해 차곡차곡 모아 두고 계신다. 아버지에게서처럼 어머니에게도 연금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연금액이 인상되어 입금이 되었기에 국민연금 관리공단에 확인했더니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서 일정한 시기에 금액이 조정된다는 것이었다. 새삼 국민연금에 대한 고마움과 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지금 직장생활을 하며 매달 국민연금을 납부하고 있다. 급여명세표에 표시되는 연금보험료를 보면 나는 마음이 뿌듯해진다. 몇 년 전 학업을 다시 시작하면서 전 직장에서 납부했던 국민연금을 반환일시금으로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매달 세금처럼 급여에서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던 것을 목돈으로 받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좋은 제도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국민연금의 본래 취지가 반환일시금이 아니라 노후를 위한 연금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나라도 이제 서방 선진국들의 복지 수준 가까이 다가선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연금을 찾아서 쓰시고 나면 꼭 한 마디 하신다. “이거 너희 아버지가 보낸 돈으로 샀다”. 그 말씀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 그리고 편안한 노후를 함께 누려보지 못하고 가신 데 대한 야속함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국민연금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번 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머니께서 훨씬 더 나이가 드시더라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보내주시는 돈을 받으실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지금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먼 곳에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또한 행복해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