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제5회 장려상)나에게 힘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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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부서
- 홍보실
- 등록일
- 2003/08/20
- 조회수
- 2290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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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장려상
나에게 힘이 되는 것
박청자/경북 구미시 도량동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다. 떨어져 흩날리는 가로수
잎을 바라볼 때면 그 아름다움보다는 떨어지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생각나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러나 봄의 생명을 위해 나뭇잎은 찬란한
최후를 맞이하건만, 내 빈 옆자리에는 영원히 새로움이란 없을 것 같다. 묻어두고 지우려고 해도, 자르면 자를수록 돋아나는 아카시아처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내 가슴속에 아픈 가시가 되어 긁어내린다.
1997년 봄부터 남편은 자주 피곤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저 직업상
술자리를 자주하기에 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한방병원에 가서 어깨에 침을 맞고 찜질을 받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나면 피곤이 덜하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 통증과 함께 피곤하다면서 침맞기를 거듭하게 되었다. 혹시 몸에 이상이 있나하여 동네병원에서
피검사와 폐검사 등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피곤하다는 남편의 계속된 말에 그해 7월에 다시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다. 결과는 간과 대장에 이상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대구의 모 병원에 8월 1일 입원을
하여 재검사를 받았다. C.T촬영과 조직검사결과 대장암 판정이 나왔으며, 발견이 되었을 때는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젊기 때문에 빨리 전이가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어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영화 속에서, 책 속에서나 생기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는 어떻게
알려야할 지 앞이 캄캄하였다. 무엇인가 오진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검사결과를 가지고 서울의 종합병원에 가보았으나 폐까지 전이가 되어
3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참담한 결과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항상 곁에서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아빠 없이 살아갈 내 딸과 아들을 생각하면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의술로 안 된다면 민간요법으로라도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모 민간요법 사무실을 찾아가 보았더니 마늘과 소금을 복용하며 맑은 공기를 많이 마시면 조금씩 회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집에서 열심히 간호하여 정성스럽게 마늘과 소금을 복용하게 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잠을 못 이루며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였다. 맑은
공기를 찾아 조용한 암자에 기거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남편의 상태는 악화되는 것 같았다. 너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모습을 옆에서
보기만 하여야 하는 나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 아픔을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암자에 들어간지 3일만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종합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다. 9월 5일 병실로 옮겨
산소호흡기에만 의존한 채 누워있는 남편에게 내려진 처방은 그저 환자 옆을 지켜주라는 말뿐이었다. 심한 고통에도 남편은 끝까지 죽음을 부인하였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 난 안 죽는다"라는 말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나의 희망도 남편에 삶에 대한 집착도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불과
암진단을 받은 지 한달 여만에 남편은 9월 6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 건강하고 씩씩하던 남편이었기에 그리고 이제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기반을 잡아갈 시기인데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이별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남편의 빈 공간은 어린 자식들과 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또한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아버님과 몇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어머님에게도 장남인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내 곁을 떠난 후, 나에게는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너무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구를 갈아야하고
수도를 고치는 일에서부터 아이들 학비를 비롯하여 생활의 모든 것을 이제는 내 손으로 해결을 해야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루는 4살 먹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발을 다쳤다는 급한 연락을 받았다. 불행중 다행인지 남편의 돌보심인지 핏줄만
터지고 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아이를 안고 한동안 눈물을 흘려야한 했다. 아이마저 내 곁에 없다면 하는 아찔한
생각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우리 가족들은 TV에서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이 나올 때면 눈을 돌리거나 다른 일을 찾아
자리를 피하곤 한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길을 피하게 된다. 아이들은 아빠가 그립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런 아이들이 불쌍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그리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 건너편 아파트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를 허전함에 가슴이 아파 오기도 한다. 저 불빛 아래에는 부부와 아이들이 모여 하루의 일 등을 서로 이야기하며 내일은 어떤 일을 할까
이야기하겠지 생각하면 평소에는 아주 평범한 삶의 모습으로 느껴지지 조차 않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도 부러워 눈물이 나기도
한다.
맏이인 딸은 그래도 의젓하여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하고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돕는 등 집안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려고 하다.
말을 하지는 않아도 집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직 어려서인지 가끔 나를 슬프게 하기도 한다. 길에서 아빠의 손을
잡고 가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서는 직장동료를 보고는 "아빠했으면 좋겠다:"라는 뜬금 없는 말을
하여 나를 슬프게도 한다. 그 자리에서는 야단을 쳤지만 뒤돌아서 서서는 한참을 울어야 했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국민연금에
가입되어 있었으니 한번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나와 가족에게는 희망의 손길이 되었다. 매월 빠져나가는
남편의 급여명세서를 보면서 아깝게만 느껴지던 것이 죽어서도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남편의 사랑이었던 것이었다.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매월말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남편의 사랑과 한참 아빠가 그리운 아이들이 의젓하게 자라서 때로는 엄마를 위로해주기에 나는 삶의 희망을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정부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느냐고 화를 내기도 한 것이 못내 부끄럽기만 하다.
'99년 국민연금이 도시지역에
적용되면서 나는 국민연금 길라잡이를 하게되었다. 우리 가정에 전해진 희망의 손길은 살림 만하던 가정주부가 사회인으로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나를 지켜보는 아이들에게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아직도 국민연금 자격취득신고를 안내하거나 징수독려를 할 때마다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혹은 경제가 어려워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과 그 진실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실이 된다면 남겨진 사람에게 국민연금은 영원히 가버린 사람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끈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가슴속에서 영원히 남편의 자리를 지워버릴 수 없음을 안다. 꿈속에서 그리고 매월통장으로 전해지는 남편의
사랑이 아이들의 가슴에 새싹으로 돋아나 씩씩하게 자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간다.
아이들이 아무런 탈없이 잘 자라주기를 병환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건강과 이제는 내 곁에 없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한다. 하느님과 아이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남편은 내가 괴로울 때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 나를 이끌어 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많지는 않지만 국민연금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힘의 바탕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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