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6회, 장려상)국민연금을 두고 떠난 행복한 여행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3
조회수
2246
내용
제5회 장려상
국민연금을 두고 떠난 행복한 여행
남정숙/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여보! 여보! 왜 이래!!"
나는 자다말고 이상한 인기척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면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입에서 와락 쏟아내는 남편을 보며 고함을 지르며 남편을 끌어안았다. 뜨끈하게 내 손에 쏟아지더니 이내 비릿함이 내 코를 찔렀다. 피였다.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나는 남편을 끌어안고 벽 쪽으로 가서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껌뻑껌뻑 몇 번을 반복하더니 환하게 형광등 불빛이 켜지자 그 불빛아래 남편은 피범벅이 되어 쪼그러 들어있었다. 으악! 나는 소리를 질렀고, 그 다음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서 병원 응급실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용인시에서 분당 C병원까지 말이다.

그렇게 병원으로 간 남편은 응급실에서 두 시간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나와 큰 딸은 49일 동안 병원 밖 땅을 밟아보지 않았다. 아니 밟지 않았다. 내 품에 넣어간 남편의 운동화를 남편 발에 신겨서 함께 걸어 병원을 나오기 전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딸 넷의 과부인 나와 결혼한 남편
나에겐 딸이 다섯이 있다. 딸 넷을 데리고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 어떻게든 굶겨 죽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았다. 그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명문대를 나온 유망한 젊은 건축학도가 어떤 기구한 운명으로 나 같은 박복한 과부 더군다나 올망졸망한 딸이 넷이나 딸린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때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남편은 정말 천사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내 아이들을 택했다. 20년 동안 단 한번도 웃음을 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강직한 나머지 일부 건축계의 비리를 눈 감아주지 못하고 건축 일에서 손을 떼고 팔자에도 없는 자장면 장사를 해서 아이들을 대학 공부까지 다 시킨 사람이었다. 막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남편은 내 친 자식이 생기면 아이들을 편애 할 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렸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건 반 지하 중국집에서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마련하려했던 15평 짜리 주공아파트 분양 사기를 당하고 부터 였다.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엇다. 남편을 만나 20년 동안 살면서 그토록 허탈해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집을 산 건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사위와 손주, 손녀들이 오면 놀고 함께 살을 부빌 수 있는 집이라며 공사현장 부지가 선정될 때부터 틈만 나면 가던 사람이었다. 그 꿈이 사라졌으니……

하지만 남편은 털고 일어 나려고 애썼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가며 자장 배달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오토바이를 사서 흰머리를 휘날리면서 배달을 했었다. 자장 한 그릇 주문만 들어와도 그렇게 기뻐하며 다시 기운을 차렸는데 이번엔 은행에 다니던 둘째 딸이 사기 결혼에 휘말리면서 6천만원 빚더미 위에 앉아 버렸다. 그렇게 아끼던 딸이 사기 결혼을 당해 빚더미 위에 앉자 남편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하루에 30분 동안만 볼 수 있는 남편
남편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여섯시부터 30분간, 저녁 일곱시부터 30분간 만이었다. 중환자실 수칙이었다. 큰 딸은 대학 졸업 후 합격한 회사 연수 기간이었지만, 결국 사표를 내고 아빠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나 보다 더 지극 정성이었다. 어떤 딸이 자기 아빠 사타구니를 들여다 보며 인상 한번 쓰지 않고, 그 더럽고 냄새 나는 배설물을 치워 내기를 그렇게 정성을 들일 수 있을까. 그것 뿐이던가, 중환자 대기실에서 다른 보호자들이 잠든 시간에도 큰 딸은 중환자실에 붙어 있는 조그만 창문 사이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게 아닐까, 간호사가 불 친절하게 대하는게 아닐까, 신경을 곤두 세우고 밤을 새웠다. 의사가 왔다 갔다 할 때 마다 경과를 묻는 통에 온 병원 의사들이 큰 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편은 점점 나빠졌다. 간경화 말기. 복수는 차서 배는 부풀대로 부풀어서 배의 혈관은 곧 터질 것 같았고 온 몸은 노랗다 못해 누렇게 보였다. 살을 누르면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 누른 자리는 오랫동안 모래에 발자국이 찍혀있는 것처럼 그대로였다. 합병증으로 패혈증까지 왔고, 신장기능이 망가져 아예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편은 자전거로 자장배달을 할 때 다리 정맥류로 고생을 했는데 그 정맥이 터져서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입을 통해 폐에 있는 피를 뽑아낼 때는 의식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 커다란 몸이 덜썩 덜썩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정말이지 차라리 내가 죽고 싶었다. 대신 죽고 싶었다. 나 역시 대장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 보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라니
하지만 의사는 우리에게 이성을 찾으라고 했다. 장례 절차와 장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큰 달은 그 추운 2월에 얇은 옷 하나만 입고 덜덜 떨면서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럴때 오빠라도 있었다면…큰 딸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나 역시 너무나 무섭고 힘들었기에 그 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큰애는 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니면서 돈을 빌어 왔다. 생전 해 보지도 않은 장례절차를 밟아 나갔고, 장지를 보러 다닐 때 남편을 크게 한번 한숨을 쉬더니 영영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따나 버렸다. 그렇게 멀고 긴 여행을 따나 버렸다.

하지만 난 막내 때문에 살아야 했다 남편이 남기고 간 혈육, 이제 중2. 막내는 그런 상황을 받아 들이지 못해 자폐증세까지 왔다.

난 집을 두고 멀리 서울 신림동까지 가서 장사를 시작했다. 보증금 없이 월세 60만원을 내는 분식집. 잠은 갸게 한 켠에 신문지를 깔고 자고 죽지 않기 위해 일을 했다. 조금만 시간이 나면 남편따라 죽고 싶은 유혹이 너무나 컸었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른 딸 들은 모두 둘째 딸 때문에 보증 피해자가 되어 고통 받았고, 용인 수지에 남아 있던 반 지하 전세집이 주인의 부도로 경매에 처하게 됐다. 월세 60만원을 내야 하는 가게였다. 남에게 악한 소리 한번하지 않고 살아온 내가 애 이토록 철저히 망가져야 하는지 나는 원망 조차 할 기운이 남질 않았었다 오로지 죽어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땐 그 생각뿐이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국민연금이라는 네글자
그 때였다 바로 그때였다. 국민연금이라는 네 글자를 알게된 건 바로 그때였다. 막내가 급식비를 가져가야 한다고 해서 통장에 남은 3만원을 찾으려고 은행에 갔는데, 156,000원이 입금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돈일까 분명히 잔액이 186.000원이었다.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정말 입금된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돈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은행아가씨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 돈 나 모르는 돈인데 잘못 들어 왔나 봐요. 정정해 주세요." 그러자 그 아가씨는 내 통장을 받아 들고 말했다. "국민연금에서 들어 왔네요. 연금 혜택 받으시나 봐요" 국민연금? 그때에서야 큰 딸이 얼마 전 내게 한 소리가 기억 났다. 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한번 정신을 차리셨을 때 무언가 무척 말하고 싶어 했는데 호흡 유지기를 입에 켜놓고 있어 말을 못했지만 아마도 보험증서를 찾아보라고 하시는 것 같아 집에 가서 찾아 보았다고 한말. 그리고 아빠에게 와서 보험증서 찾았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니 무척 안도하시더라고… 하지만, 그 보험증은 오토바이에 관련된 사고 보험이라서 남편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남편 사망신고를 하고 큰 딸이 남편의 유품을 정리 하다가 "아빠가 국민연금 부으셨어요?"하길래 "그래, 그 소용도 없는거…. 그럴 돈 있으면 나나 달라고 했는데 꼭 넣더니 찾아도 얼마되지 않을 꺼야." 라고 대꾸 했는데 큰 딸이 그 서류를 들고 국민연금공단으로 갔던 기억이 났다.

그랬다. 남편은 오토바이 보험증서를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무언가 뒤통수를 강하게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앞날을 대비하며 우리 가족을 위해 끝까지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내 남편. 나는 국민연금 유족연금대상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은행을 나오면서 흘렸던 눈물
그 길로 나는 은행을 나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보듯 쳐다보며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지만 난 정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내 손을 잡아 준 국민연금, 돈 많고 잘사는 사람들이야 그깟 몇 십만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몇 백 몇 천만원보다 더 값진 돈이었다.천군만마를 얻은 그 기분으로 나는 다시 살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국민 연금은 내게 와서 여태껏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비록 어두 컴컴한 반 지하 단칸방에서 딸과 함께 어렵게 살고 있지만, 국민연금이 있어 결코 외롭거나 절망스럽지 않다. 남편이 국민연금을 넣겠다고 했을 때 그깟 눈먼 돈이라고 타박했던 내가 부끄럽기까지 했다. 혹시 지금 그런 생각을 갖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말 할 것이다. 국민 연금은 언젠가 당신이 늙거나 병들어 삶의 의욕을 잃을 때 가장 크고 강한 의지가 되어 줄 것이고 당신이 홀연히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가족을 지켜줄 유일한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끝으로 국민연금에게 정말이지 다시 한번 이 글을 빌어 감사를 드리고 싶다.남편은 지금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먼 훗날 남편을 만나면 꼭 말해줄 것이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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