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4회 최우수상)새로운 삶을 위하여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2

조회수

2179

내용

제4회 최우수상
새로운 삶을 위하여

서 경 옥 /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올 여름은 유난히 장대같은 비가 많이 내려서 우리집을 비롯해 이웃들이 물난리로 심한 고초를 당했다. 입만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 짓던 이웃들도 이제는 약간의 안정을 찾은 듯 하나 그 깊은 시름은 다 어떡하나. 모두들 용기를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9월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고 청명하게 차라리 눈부셔서 얄밉기도 하다. 이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오는데, 한번 떠난 사람은 영영 돌아올 줄 모르니 한스럽고 원통함을 어찌 글로 표현 할 수 있을까?

1997년 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두렵고 슬펐던 시간이었다. 연일 TV에서는 IMF에 관한 뉴스로 가득했다. 평소에 건강해서 한번도 병원을 찾은 적이 없었던 남편은 금방이라도 훌훌 털고 일어날 것처럼 병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닥쳐올 IMF를 어떻게 잘 넘길 수 있을까를 염려하고 있었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지난 이십여년간 무역회사에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악세사리 수출업을 경영하게된 남편이었기에 어두운 경제전망에 대한 관심이 남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즈음 나는 의사로부터 남편의 병이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이미 간까지 전이되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참으로 기막히고 어이없는 일이었기에 남편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그를 결단코 보낼 수 없었기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갈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결국 자신의 병명도 모른체 한달 반만에 서둘러서 홀연히 그리고 바람처럼 그는 떠나고 얼어붙은 땅속에 남편을 묻어 주고도 혼자임을 실감하지 못했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살아있어 애지중지 하던 직장도 떠난 후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남겨진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서러워 겨울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그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던 중 회사에서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성동구)에서 신속하고 친절하게 처리를 해주어서 경황이 없던 중에도 위로가 되었다. 번거롭지 않도록 통장으로 자동입금되게 해주며 위로해 주었고 3개월 마다 정확한 날짜에 입금되니 확인해 보라고 했다.

3개월에 한번씩 정말 그의 흔적처럼 돈이 입금되었다. 이것이 그가 나를 위해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얼마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떠났으면서도 내게 남긴 마음의 위로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소중하고 또 설움이 북받혀서 울고 또 울었다.

내가 남편의 곁에 갈 때까지 나는 그를 대신해서 연금을 받는다고 했다. 내가 그의 반쪽인 것처럼 그가 노후에 받을 금액의 절반을 내가 받는가 보다.

혼자 살 것을 준비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앞으로 홀로 살아가야 할 긴 세월을 나는 염려해야 한다.

물론 IMF로 인해 많은 어려움도 있겠지만 내게 맡겨진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큰 아이가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우선 연금으로 학비는 충분히 해결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내년까지 열심히 노력하여 안정된 자리를 마련하면 대학을 보낼 때쯤이면 나아지겠지...

어려울 때 내게 일어설 용기를 준 ‘국민연금’은 작지만 큰 위로가 되었다. 삶에 어려움이 없었을 때는 어느 것도 고마운줄 몰랐는데 이렇게 마음에 큰 위안을 받고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미리 준비해 둔 것이 어려울 때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고 또한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를 보낸지 벌써 10달이 지났다. 그 동안 조리사(한식) 자격증도 준비해 두었고 여러 가지 음식에 관한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이다.
가정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림만 살던 주부가 어느날 갑자기 남편을 보내고 그야말로 ‘가장’이 되면서 그 동안 남편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힘들고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낄 때 미안하면서도 고맙기도 한 마음으로 괴로워 했다.

난 아직도 그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매달 용돈을 챙겨준다고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매달 어김없이 용돈 받는 사람도 드물걸? 하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실함을 이제는 내가 보여줄 차례인 것 같다.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용감한 척 한다.

이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르게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거리에 나가보면 모두들 힘들어하는 지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꼼꼼히 세워서 우리들의 힘들었던 시간을 결코 물려주지 않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우리가족은 5년전부터 ‘가족신문’을 만들고 있다. 남편은 떠났어도 그가 남긴 글들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에 창간호에 실린 글을 다시 한번 새기면서 적어본다. 남편의 유언처럼 ......


한울타리는 하나의 인격을 지닌 개인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또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나보다 남을 중요시여기는 공동체의식은 물론,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다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우리 삶의 터전인 셈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항상 기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울타리 창간호 축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