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7회, 장려상)내 불구를 부축하는 국민연금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3

조회수

2235

내용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 하지만, 불행만큼은 다 남의 일로만 알았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인생사 때로 굴곡도 있기 마련이라지만,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행이 갑자기 닥쳐왔을 때의 그 좌절감이란, 누군들 쉽게 견딜 수 있을까.
짧지 않은 내 인생이 모두 허무로 돌아가고 남은 인생은 오로지 어두움뿐인, 깊이를 모르는 늪.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마치 평탄한 길을 가던 중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 빠져들 듯이 모든 게 변해 버렸다.

오래 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내 삶의 저편만큼 멀게 느껴지는 그 일은 불과 1년 전인 2004년 12월, 모두가 행복해하며 서로를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12월 25일 성탄절에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내게는 남은 인생을 모두 어둡게 만든 불행의 첫날이었다.
크리스마스 휴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겠다며 외지에 나가있던 아들과 딸들이 온 날이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란 언제나 보살펴야만 할 어리기만 한 존재. 집을 떠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공부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따스하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서로 손잡고 웃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전하고 정을 나누는 시간을 잠시 보낸 후 - 어버이란 그런 것이다 - 이미 온다는 전갈을 받고 따뜻하게 덥혀 놓았던 방이지만 행여나 온기가 식을까 해서 나는 아궁이를 보러 나갔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기름보일러를 일찌감치 연탄아궁이로 개조하여 놓았으나 오늘만큼은 그까짓 연탄값쯤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공기구멍을 다 열어놓았었다. 새로 연탄을 갈아야 할 때라는 짐작이 들었던 것이다.
화덕 뚜껑을 열자 불꽃이 넘실넘실 넘치도록 잘 타고는 있었지만, 긴 밤 내도록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자면 이른 대로 그때쯤은 새로 연탄을 갈아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에서 타고 있는 연탄을 들어내 놓고 아래의 연탄을 빼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뜨거워지더니 연기와 불꽃이 피어올랐다. 얼떨결에 연탄을 놓고 보니, 먼저 내려놓은 연탄불에 닿아 바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손을 내저어 불을 끄려고 하였지만 불은 더 번져가기만 하였다. 수도가 마당 한편에 있어서 곧장 거기로 뛰어갔으면 지금의 후회도 없으련만,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손을 내젓기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바지를 벗어던지기만 했어도 가벼운 화상 정도로 끝나고 지금은 ‘큰일 날 뻔한’ 옛이야기로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생각도 못한 갑작스런 일을 당하면, 그 일이 설혹 작은 사건이라 해도 평상심을 잃게 되거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나 진배없는’ 바지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남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한 듯이, 바지를 벗어던지지 그랬냐고 뒤늦은 훈수라도 둘 법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할 뿐 어쩔 방법이 없었던 일이었다.
비명소리를 들은 가족들이 밖으로 뛰어나오고 이웃이 몰려들었을 땐 이미 허리 아래는 모두 불이 붙어 있었던 때였다. 뒹굴며 신음하는 나에게 모두가 달려들어 불을 끄고 119구급대를 불러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치료의 과정은 얼마나 힘겨웠으며, 좌절감은 얼마나 내 마음에 상처를 냈는지는 기억하기조차 싫다. 결국 다음 해 6월이나 되어 퇴원했을 땐, 흉칙한 화상이 하반신을 덮어 더운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을 수 없게 된 몸이었다. 아니 외양이야 가릴 수 있다 해도, 다리를 굽히거나 벌리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된 모습은 감출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다는 절박감으로 필사적인 재활운동을 통하여 가능하였으니 더 이상의 호전은 영영 바라기 어렵게 된 상태였다.
몸이 건강했을 땐 그렇게 당연하고 수월해 보이던 일상들이 모두 나에겐 손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일이 되었다. 몇 달을 침대에서 누워있거나 거실을 간신히 오갈 수 있는 게 행동반경의 모두가 된 나는, 세상이 싫어져 신과 운명을 원망하고 가족의 짐이 되고 있는 나를 미워하기만 하였다.
새마을지도자로 마을이며 면의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이웃과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했던 기억들은 더 생각하기조차 싫은 딴사람의 이야기가 되었으니, 상심한 마음을 달래려 곧잘 술을 찾게 되었다.
그런 상심의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며 나는 영 폐인이 되는가 싶었다.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는 불구의 몸으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서 돌아온 아내에게서 국민연금에 장애연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내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 채 이웃과 이야기하던 중에 누군가 국민연금에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도 든든해 보이는 법이라 하더니,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내게는 복음처럼 다가온 소식이었다. 급히 알아보니 더 다행하게도 7월부터 내가 사는 영주지역에도 국민연금관리공단 지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에 우선 전화를 걸어보자 담당자가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를 해주었다. 알려주는 대로 서둘러 진단서 등 자료를 준비해서 지사를 방문하니 장애연금 청구가 가능하다는 기쁜 답변을 해주는 것이었다.
심사를 받는 한달 여의 기간이 지난 후 드디어 집으로 장애연금 3급이 결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 다음 달의 말일엔 1년간 쓰임새 없었던 내 통장에 3개월분의 장애연금이 입금되었다.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며 아직은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구나, 내게도 작은 희망이 생겼구나 하는 기쁨이 샘솟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쁨은 그동안 상심 속에서만 갇혀 지내던 나에게 바깥의 시원한 바람을 맛보게 하는 청량감과 함께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돼 주었다. 짜증만 내어 그렇잖아도 힘들어 하는 아내에게도 조금은 떳떳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연금제도가 개인에게도 적용되었던 1995년, 도대체 이런 제도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며, 불평을 하면서도 국가에서 법으로 시행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가입하였던 국민연금. 그런 마음 때문에 사실 많은 보험료도 내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마저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적선하는 양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었다. 세월이 가도 늙지 않을 것 같았고, 자식들의 부양을 바라지 않고 늙는다 해도, 그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 한입치레야 못할까 싶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업으로 하는 몸이 쌀 떨어져 굶기야 하겠냐는 무대책의 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 흐르면 사람은 늙고 병든다는 것, 누구에게나 가림없이 오는 노후라는 것. 때때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러할 때 국민연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누구든 반드시 맞게 되는 노후를 대비할 뿐만 아니라, 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입어 소득활동을 하지 못할 때, 국민연금은 그 사람이 잃어버린 부분과 역할을 대신하여 채워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이렇게 경제가 어렵다고 다들 아우성일 때, 경기에도 영향 받지 않고 꼬박꼬박 지급될 뿐만 아니라 물가가 오르면 오르는 대로, 기한도 정해지지 않고 나를 끝까지 동행하는 연금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친구보다 더 믿음직한 존재가 아닌가, 믿음직스럽기만 한 국민연금이 되었다.

사고를 당한 지 어느새 일년이 다 돼간다. 더 이상의 차도는 없고 이 장애가 내 남은 생에는 계속되겠지만, 그 장애의 반대편에는 연금이 있어서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
내가 낸 보험료보다 훨씬 많은 연금으로 내게 주어져 고맙지만,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내가 기여를 하고 받는 연금이라 당당하고, 그래서 연금을 받는 날이면 아내에게도 당당하다.